짧게는 석 달, 길게는 여섯 달이라고 하던 그의 시한부 생명이 이제 한계에 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 지인(知人)은 길게 잡은 여섯 달 시한조차 무려 세 번이나 뒤로 물러서게 할 만큼 자신의 생명의 불을 당당하게 지켜왔던 것이다.이제 의학이 발달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의 불이 꺼질 시각을 알 수 있게 된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있다. 그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불행이라고 해야 할까. 선택적으로 대답할 자신이 없는 나는 그 까닭을 육십을 넘긴 내 나이 탓으로 돌리고 싶은 심정을 어쩔 수 없다. 내가 나의 생명의 등잔에 남아 있는 “기름”의 양을 알게 될 때, 나는 어떤 생각과 태도를 취할까?
그 지인은 자신의 시한부 생명에 관해서 억울하고 모진 통고를 받은 그날부터 죽음에 의연하게 맞섰다. 자신의 사후에 대비하는 사회적 조처를 한 뒤에 그는 결연하게 암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거듭되는 강력한 항암 치료로 신체적 불균형이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얼굴과 몸의 타고난 단아함을 결코 잃지 않았던 그는 달라져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얼굴을 세상에 숨기지 않았다. 가망이 없는 상황에서 입원하게 되는 열흘 전쯤의 주말에도 버스를 타고 지기들과 함(躍如)께 시외의 미술관 나들이까지 하는 정신이 약여했다.
점점 더 가까워져가는 마지막 시간을 알면서도 도심에서 외식도 하고 심지어 해외 출장까지 가는 그의 모습에 중첩되어 이 글을 쓰는 이 새벽의 나의 책상 앞 유리창 위에 떠오르는 한 얼굴이 있다. 참으로 그리운 얼굴이다.
그 준수한 얼굴의 임자가 치명적인 병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그가 병원에 들어간 지 한참 후였다. 전화 저 멀리에서 그의 아내는 그간의 자초지종을 짧게 설명한 후 찾아가겠다는 나의 청을 부드럽게 거절했다. 당신 자신이 그 누구도 만나지 않겠다는 완강한 뜻을 가졌다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야속하게 생각했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달포가 좀 지난 후 9월이 끝나갈 무렵, 그의 부음이 왔고, 빈소에서 미망인은 고인이 거의 혼수 상태에서 다만 한 친구와 한 후배만을 각각 불러서 따로 만났다고 했다. 그 고인은 이미 입원 당시에 자신의 생명의 불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탱될지 충분히 알았지만, 행동과 생각이 크고 넓고 직립했기 때문에 결코 죽음에 대해서 구차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당대의 문장가라고 할 수 있었던 그의 글 역시 사무사(思無邪)와 절차탁마(切磋琢磨)라는 표현에 결코 부끄럽지 않은 글이었다. 뚜렷하여 각별(各別)하되 양명(陽明)한 친구였다.
그 고인은 내가 앞에서 쓴 그 지인과는 전혀 다른 사고와 행동을 했던 것이다. 그는 죽음의 시한을 알게 된 날부터 세상과 일체 절연하고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밥을 먹고 몇 평인가의 병실에서 기나긴 여름의 나날들을 혼자서 보냈다. 그의 아내가 밤낮으로 수발을 들었으니, ‘둘이서’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여름 밤은 짧았지만, 아내와 함께 보내던 그의 안타까운 새벽은 마침표가 찍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고인에게 한 칸 방이 자신의 생명의 불을 밝힐 넉넉한 공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지극한 아내의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 지인에게 이 넓은 사회가 자신의 따뜻한 공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내의 사랑에 곁들여 한 친구의 돈독한 우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지인의 긴 투병 기간에 그의 친구는 자신도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는 좁은 길을 가야 하는 때도 있었지만, 언제나 그의 손을 놓지 않고 같이 걸었던 훌륭한 친구였다.
자신의 죽음의 시한을 알 수 있는 것은 다행일까 불행일까. 나는 그 물음에 결코 답할 수 없으나, 그런 한계상황에서 다시 만남을 도저히 약속할 수 없는 헤어져야 하는 사람에게 망자(亡者)가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남겨줄 것인가 하는 것은 망자 자신의 결정이라는 것만은 말할 수 있다. 평상의 자신의 얼굴을 지인들에게 남겨놓으려는 망자는 그 고인처럼 세상과의 절연을 선택하지만, 반면에 비(非)평상의 자신의 얼굴을 남겨놓게 되는 망자는 그 지인처럼 끝까지 세상과의 관계를 선택한다. 한쪽은 평상의 얼굴을 ‘세상에’ 두고 가고, 다른 한쪽은 평상과 다른 얼굴을 ‘지인들에게’ 두고 간다. 다만, 보통 사람의 경우, 순리와 정상은 ‘다른 한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죽고 나면 주검을 온전히 그대로 가져가는 매장이든, 하늘에 흩날리는 연기와 땅에 흩뿌리는 재로 남기는 화장이든, 망자가 참으로 세상에 두고 가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때때로 기억하는 자신의 마지막 얼굴이다. 그 얼굴이 평상의 것이든 비평상의 것이든, 그리운 것은 그리울 뿐이고 그리워해야 할 것은 그리워해야 할 뿐이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도록 그리운 피안의 사람을 추억하는 사람에게는 이승의 밤이 깜깜하면 깜깜할수록 유리창 위에 떠오르는 그 얼굴의 형상이 더욱 또렷할 것이다.
밤의 두터운 적막 속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별은 당신의’ 얼굴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당신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그리운 망자의 얼굴이 오롯하게 눈앞에 떠오른다면, 그 얼굴은 다른 그 누구의 밤이 아니라 ‘나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이다. 이 밤이 가고 날이 밝으면, 나는 그동안 닦지 못했던, 아니 구조적으로 대부분은 닦을 수 없는 붙박이로 되어 있는 아파트 마루방의 전면(前面) 유리창에서 먼지를 닦아낼 방법을 찾아보아야겠다.
유리창이 맑고 깨끗해지면, 행여 나의 성년이 된 딸도, 이 복잡한 소음의 도시에서일망정, 혼자 있는 깜깜한 밤에는 유리창에 입김을 불어 검지 끝으로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고 이름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조선일보」 2007년 4월 7-8일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