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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자 소개

박종만朴鐘萬

1945년 7월 26일 태어나서 부산에서 성장했다. 부산시 부민초등학교, 경남중고등학교, 부산대학교 문리과대학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서울대학교 신문대학원을 수료했다. 대학 재학 중 육군에 입대 하여 단기 하사로 복무했으며, 마지막 1년은 공병의 병과로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었다.

  • 1976년
    월간 [뿌리깊은나무]가 창간될 때부터 편집부에서 일했다.
  • 1977년 8월 5일
    "도서출판 까치"를 설립하여 등록했으며, 같은 해 10월 18일 「사건기자」(김영백 저)를 첫 책으로 출판했다. 다음 해인 1978년 9월 20일 사회과학 분야의 책으로는 첫 번째 책이었던 「한국민족주의의 이념과 실태」(차기벽 저)를 선보였으며, 그 이후 사회과학과 역사 분야 전문 출판사로 발돋움했다.
  • 1992년
    문화부 장관 표창장을 수여받았다.
  • 1996년
    "도서출판 까치"는 "주식회사 까치글방"으로 법인화되었다.
  • 2000년
    "책의 날" 기념 국무총리 표창장을 수여받았다.
  • 2001년
    올해의 출판인 공로상(한국출판인회의)을 수상했다.
  • 2004년
    제36회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문화부문을 수상했다.
  • 2017년
    까치글방의 대표 직책에서 물러나 편집위원으로 일했다.
  • 2018년 12월 16일
    서울 논현동 성당에서 프란치스코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받았다.
  • 2020년 6월 14일
    지병으로 타계했다.
  • 2020년 10월 13일
    대한출판문화협회로부터 한국출판공로상 특별공로상을 사후 수상했다.

박종만

  • 가을 빈 벌은
    문득 내게 눈물 주네
    망각을 열애하던 내 젊은 날의 한낮을 건너서
    저 서천의 희붉은 해는 무리 속에 잠겨 있네
    어린 친구들과 볏단을 목마(木馬) 삼던
    가을걷이 날의 심금(心琴)은
    억새잎 바람에 나를 추억케 하네
    밤, 이 벌의 무성한 어둠을 헤치며
    도깨비불을 좇아 휘달릴 때
    나는 나이가 여나믄
    친구가 여나믄이었네


    갈마쥘 것도 없이
    돌팔매로 허공중을 깨면서
    나는 망막한 밤의 우주로 통하는
    동구밖 황톳길 위에 걸려 있었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서
    빠져나올 수 없는 꿈의 늪에 잠겨들었네
    누구를 기다려서 밤을 밝히던
    처마끝의 남폿불도 꺼지고
    동천에 바알간 아침이 서리면
    서리 덮인 벌은 부르르 몸을 떨며 잠에서 깨어났네
    객지에서 돌아오던 아버지의 귀갓길처럼
    구름은 산정(山頂)에서 성큼 내려서는데
    잰걸음으로 걷는 구름 그 그리메가
    나를 감싸며 지나가는 지금
    문득 내게 눈물 주네
    가을 빈 벌은

    (1990년 이전 작시.)
  • “이제는 아예 모실 작정이군요.”
    어제 가져온 청동합(靑銅盒)에 쌀을 담아 사무실의 옛 불상 앞에 놓아두고 싶다는 내 뜻에 당신이 정색을 하면서 한 말이었소. 우상을 거부하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당신으로서는 의당 가질 법한 항변이었소. 나는 일리가 있는 당신의 항변에 내 뜻을 접었으나 옛 나무궤 위에 1년 넘게 앉아 있는 불상을 생각하면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었소. 그때 내 눈에 마루의 화분 위에 한 움큼 떨어져 있는 부겐빌레아 꽃송이들이 들어왔소.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녹색의 녹이 알맞게 번진 청동합의 뚜껑을 열고 아침 햇빛을 받아 더욱 바알개진 꽃송이들을 합 속에 담았소. 물론 그것까지 당신에게 말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았소.

    40센티미터의 키에 둘레 1미터에 지나지 않았지만, 가지마다 꽃을 촘촘히 드리운 관목의 부겐빌레아가 우리집 분위기를 한동안 화사하게 바꾸어놓자, 그런 세상사에 무심한 당신도 유심히 꽃을 쳐다보기도 했소. 붉되, 지나치게 붉지는 않은 꽃은 너무나 밝고 맑아 특히 그루 전체를 뒤덮고 있던 열흘간은 나의 귀갓길을 재촉하기도 했소.

    내가 첫 인연을 맺은 부겐빌레아는 꽃이 무더기로 핀 2미터 키의 교목 같은 부겐빌레아였소. 그것은 5년 전의 일이었소. 해가 설핏 기운 도심의 꽃집 앞에 서 있던 그 꽃나무를 본 나의 기쁨은, 봄의 여행길에서 산모퉁이를 돌다가 녹음 속에서 꽃을 활짝 피운 큰 산벚꽃나무를 발견했을 때의 바로 그것이었소. 나는 우리 아파트 마루의 크기나 넓이도 염두에 두지 않고 집으로 옮겨왔지만, 그것은 내게 채 열흘 동안의 꽃 그늘을 주지 않은 채 고사 직전에 이르렀소. 그러나 그 짧은 시간에 누렸던 화사한 꽃 그늘의 행복은 당신에게 어른답지 못하다는 핀잔을 들었지만 내게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되었소.

    그 교목의 5년 전의 서늘한, 그러나 고사의 불안한 기억 속에서 사온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작은 키의 부겐빌레아는 착실하게 꽃을 피우면서 아침에는 아침대로, 저녁에는 저녁대로 우리에게 조촐한 즐거움을 나누어주었소. 특히 나는 신새벽에 꽃 한 송이가 뚝 하고 떨어지는 소리에서 중력의 위력을 실감하기도 했소. 그것은 새벽잠이 없는 나만이 혼자 누릴 수 있는 각별한 것이었소. 영랑(永郞)의 모란꽃이 낙하하던 한낮과 나의 부겐빌레아 꽃이 낙하하는 새벽은 그 정적의 밀도가 너무나 다르겠지만, 무게를 가진 것이면 낙하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비애의 밀도는 서로 다를 수 없을 것이오.

    부처님의 건강을 염려하는 나의 부질없는 안타까움에도 불구하고, 쌀이 아닌 꽃잎을 부처님에게 드리는 나의 마음은 낙하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비애에서 비롯된 것이었소. 낙하하는 인간에 대한 비애는 그리스도와 불타가 다름이 없을진대, 과학의 원리도 신의 섭리도 눈밖에 두고 자신의 무게를 화택(火宅) 위에서 지탱하려고 하는 나는 쌀과 꽃잎을 구별하면서 비애해야 했던 것이오. 그리고 꽃잎인들 쌀인들 당신인들 나인들 낙하할 운명인 것을 말이오. 부겐빌레아 꽃이 나뭇가지에서 내게 주던 차안의 행복은 짧았지만, 청동합 속에서 부처님을 모시는 피안의 행복은 참으로 길 것이라고 나는 감히 생각하오. 그 부처를 바라보는 당신의 주 예수 그리스도도 행복한 얼굴을 할 것이라고 나는 다짐하고 싶소. 그리고 언제나 나의 애틋한 당신 또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헤아리리라고 믿고 싶소.


    (제목 미상의 잡지에 게재. 1990년대 전반기.)
  • 달포 전에 곽말약(郭沫若)선생의 중국 고대사상에 관한 책을 냈고, 보름 전에는 러시아 통사를 출판했다. 650여 쪽과 800여 쪽에 이르는 상당한 분량의 것이었고, 기획에서 출판까지 각각 6년과 8년이 소요된 난산의 작업이었다. 이 글을 쓰는 새벽의 책상머리에서 그 두 권의 책을 펼쳐보면서 나는 나의 출판업 15년 동안에 이루어진 100종 이상의 사회과학 서적들의 운명을 생각하고 있다.

    곽말약 선생의 저서는 100여 권, 러시아 통사는 10여 권이 판매된 이즈음의 사태를 당해, 나는 나의 100여 종의 이른바 사회과학 서적의 대부분의 지형이나 필름들이 이제는 재생 쓰레기 대접도 받지 못하게 된 현실을 비탄할 뿐이다. 물론 책도 생명이 있는 것이요, 특히 사회현상을 다룬 사회과학 서적의 경우는 더욱 생명이 한정적일 것이다.지난 20여 년 동안, 갈등과 암흑의 한국 역사 현장에서 기묘하기조차한 한국적 작명(作名)의 “사회과학” 책은 비정상적인 성장을 했다. 발행 종수도, 발행 부수도 엄청났다. 이제 국가적으로는 민주화와 세계사적으로는 사회주의 국가 쇠망의 진운 및 전망 속에서 과거의 역사적 소산이었던 좌익 이데올로기 편향의 “사회과학” 책의 쇠퇴는 당연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은 기존의 비(非)이데올로기적인 “사회과학” 책뿐만 아니라 현재 생산되고 있는 기초학술 서적까지 전혀 입질의 기미도 찾아볼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 책임은 1차적으로 독서인들의 독서의욕을 자극하지 못하는 기획역량 부족의 출판업자에게, 2차적으로는 참으로 한정된 종수의 학술서적도 수용하지 못하는 학계에 있을 것이다. 물론 초판 1,000-2,000권도 소화하지 못하는 이 사회의 제도적 불비(不備), 특히 도서관의 제도적 불비 또한 그 근본 이유 중 하나이다.

    설사 그렇기로서니 100만여 명의 대학생이 있고 과소비로 비만증에 시달리는 이 사회가 책에 대해서는 이래도 되는지, 참으로 이래도 되는지 반문하고 싶다. 단 1권이 소용되더라도 사회의 근본과 진보에 궁극적으로 도움이 된다면, 출판하는 것이 출판인의 직업적 소명일진대, 이러한 반문은 들려오지 않을 메아리임이 분명하다.

    대중소비 사회에서는 소비상품으로서의 책이 책시장의 대종이 되는 것은 정한 이치이다. 그러나 사회의 근본과 발전의 초석이 될 수 있는 책도 단순재생산은 가능할 만큼 용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정녕 이래도 되는가, 이 반문을 하는 출판업자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미력하나마 다해 노력하며 긍정적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왔다고 스스로 믿는다면 이 반문이 출판업자의 고단한 반문에 불과하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의 끝머리를 향해 산음(山陰)의 계곡을 훑어내린 비풍(悲風)이 참우(慘雨)를 몰아 달려갈 날도 이제 오늘내일이다. 그러나 조붓한 어깨의 들길섶에는 민들레 씨앗이 개똥 속에서 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책을 만드는 나의 희망은 권정생 선생(아동문학가)의 “민들레 씨앗의 소망”은 물론이고 과학적인 마르크스 선생의 “밀알의 소망”과 함께 리카도 선생의 밀알의 그것도 똑같이 이루어질 수 있는 책의 봄이 이 비풍참우의 늦가을이 가고 겨울이 가면 다시 찾아오리라는 것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는 암흑시대였으나 책에 있어서는 분명히 감격시대였다.


    (「중앙일보」 1991년 11월 6일자 게재.)
  •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 일찍 도시락 한 개와 책 두 권을 들고 집을 나선 뒤, 길을 걸어서 낮을 보내고 밤이 이슥할 때에야 집에 돌아오는 나날을 보낸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해 4월 초부터 10월 말까지의 일곱 달 동안이었다. 이태 후에나 대학에 가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하루 24시간이, 그것도 한칸 방 속에서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간들이 너무나 무거워서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다.

    당시에도 인구가 100만이나 되었던 항구도시 P의 내가 살던 서쪽(서구와 중구의 일부)은 바다와 연결되는 남쪽말고는 산들이 둘러싼 분지 같은 형태였다. 나는 도시를 북행하여 북쪽 산을 넘는 산길을 택하여 낙동강이나, 서쪽 산중턱에 있는 비포장 신작로를 택하여 바다로 갔다. 산길로 출(里程)발하는 이정(洗足)은 대체로 산속의 수원지에서 세족을 하고 고개를 넘어 산마을을 통과한 뒤에 하산하여 낙동강으로 나가서 수십 리 남북으로 뻗어 있는 둑방길을 거쳐 또다른 고갯길을 넘어 산중턱의 신작로로 귀가하는 칠팔십 리였다. 산중턱의 신작로로 출발하는 또 하나의 이정 역시 칠팔십 리였는데, 그것은 산길의 귀로에 해당되었으며 고갯길을 넘어서 이십여 리를 간 뒤에 감천 포구 주변의 바다로 나가서 바다에 면한 산기슭 신작로를 거쳐 돌아오는 것이었다. 길을 가다가 지치면 산속이나 산기슭, 강둑 경사면이나 해변의 큰 바위 틈에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그것도 싫으면 가지고 간 책을 읽었다.천성이 부지런하지 못한 내가 이때처럼 문학 책을 가장 지속적으로 보았던 적은 달리 없었다. 그때의 내 길동무가 되었던 책은 두 권의 번역서, 「고문진보(古文眞寶)」와 레마르크의 「개선문(Arc de Triomphe)」이었다. 봄에서 가을까지 계속되었던 칠팔십 리의 나날의 이정에서 겨우 두 권의 책만을 읽었다는 것은, 그것도 두 가지의 코스만을 택함으로써 하루 걸러 똑같은 풍경들을 지나가는 이정일진대, 참으로 무미건조하고 비능률적인 책 읽기였다.

    이 경우, “책 읽기”라는 표현은 온당할 것 같지 않다. 그것은 대하장편소설도 아닌 「개선문」마저 쉬는 사이에 짬짬이 하루에 몇 페이지씩 반년이라는 너무 긴 시간 동안에 읽은 탓에 온전한 줄거리조차 파악하지 못했던 난감한 책 읽기였기 때문이다. 중국의 옛 시와 글을 광범위하게 모아서 훌륭하게 정리한 「고문진보」의 내용도 체계적인 한문교육을 받지 못했던 나인지라 주해와 번역에 의지하여 가까스로 의미를 새길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고문진보」만은 걸으면서 외우기도 하여 여름이 끝날 무렵에는 서너 시간을 암송할 수 있는 넉넉한 독서가 되었다. 이태백의 “촉도난(蜀道難)”, 백낙천의 “장한가(長恨歌)”, “비파행(琵琶行)”,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제갈공명의 “출사표(出師表)”, “후(後)출사표”,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 “후(後)적벽부” 등이 그때 내가 꿰뚫었던 시와 글들이었다.

    산골짜기 물이 풀리면서 반짝이며 흐르고, 산사태가 난 듯이 피었던 꽃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군락의 진달래더미가 연초록 새잎으로 자신의 자리를 뒤덮는 초봄에 읽었던 “귀거래사”의 한 구절—“나무들은 기뻐하면서 생생하게 자라고 샘물은 졸졸 솟아서 흐르기 시작한다(木欣欣而向榮, 泉涓涓而始流)”—은 지금도 시정의 한 필부로서 삶을 어렵게 감당해가는 나를 부끄럽게 한다.

    초등학교 시절 4년을 보낸 내 유년의 자취가 오롯이 남아 있는, 강 건너의 또 하나의 둑방 너머 마을의 상공을 지나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풀이 파릇파릇한 강언덕(靑靑河畔草)”에서 읽었던 “악부(樂府)”는 시인의 이름조차 잃어버린 시였기 때문에서인지 더욱 애절했다. 비포장 신작로의 먼지가 내 얼굴의 땀에 그대로 눌러붙었던 한여름에 연못가에서 찾았던 “나는 흙탕 속에서 꽃을 피우되 더러움을 타지 않는 연을 사랑한다(子獨愛蓮之生淤泥而不染)”는 구절은 땡볕에 시달리던 그 연못 속의 연꽃을 더욱 고고하게 형용하는 듯했다. 주무숙(周茂叔)의 삶의 실상을 나는 편린조차 알 수 없었지만, 반찬 한 가지의 딱딱한 도시락 밥덩어리 위에 떨어지던 내 눈물의 맑음 또한 슬픈 것만은 아니었다.

    여름이 가고 햇빛이 한결 투명해가던 초가을의 바닷가 바위 틈에서 나는 「개선문」의 중간쯤을 읽었다.
    “……파도는 바위를 연모한 끝에 그 바위에 미치게 되어 점차 그 바위 밑을 파먹어 들어갔지. 어느날 급기야 바위는 지쳐버렸고 그 밑은 완전히 파헤쳐져서 파도의 가슴 속에 묻혀버리게 되었어……” “……이제 바위는 파도 속에 빠져서 바다 속에서 뒹구는 한 개의 돌덩어리에 지나지 않게 된 거야. 파도는 실망하여 속았구나 하고 다시 다른 바위를 찾아가게 되었지.” “무슨 뜻이죠? 한번 바위면 영원한 바위여야 할 게 아니에요?” “언제나 파도는 그런 말을 하지. 그렇지만 움직이는 것은 움직이지 못하는 것보다 강한 법이거든.” 인생의 파도는 바위의 대상을 찾아서 끝없는 행위를 반복하는가? 그것은 시작이 끝이고 끝이 시작인 무한 윤무(輪舞)의 어우러짐인가? 피난민 라비크가 정처를 잃은 마두를 데리고 갈 수 있었던 곳은 어디였던가?

    바람이 한기를 느끼게 하고 풀이 생기를 잃어가던 늦가을의 강언덕에서 나는 「개선문」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유능한 외과의사였던 라비크조차도 “당신을, 당신을……안아보고 싶어요……그런데 제 손이 도무지……” 하고 절규하면서 “사랑할 때에 죽어야 하는” 마두가 “살려줘요…… 살려줘요, 아!” 할 때에 그녀의 죽음을 재촉하는 주사를 꽂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유전(流轉)의 운명 속에서 결국 프랑스의 강제수용소에 들어가기 위해서 독일의 강제수용소를 탈출한 셈이었던 라비크의 생은 무엇이었던가?

    이미 내게는 유일한 일이 되어 있었던 길걷기를 다음날 아침부터 중지하기로 작정하면서 산모롱이 길을 돌아오던 밤의 불빛 속에서 희부옇게 드러나던 음울한 1960년대 중반의 습기찬 항구도시는 “밤과 더불어 왔다가 어둠과 함께 사라지는 일상의 절망”이 짙게 배어 있었던 「개선문」의 밤을 예비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영풍문고」 1993년 4월호 게재.)
  • 24년 전 한여름, 그때 나는 26세의 나이였으며, 군복무 3년 중 마지막 1년간을 보낸 베트남에서 돌아와서 제대한 지 서너 달이 된 대학 휴학생이었다. 9월 학기의 복학을 기다리는 내게는 그 여름나기가 그렇게 지루하고 무료할 수가 없었다. 학생 신분이었으니 공부를 하면서 복학을 준비하는 것이 당연지사였으나, 그 당시의 암울한 세월 속에서는 더욱이 천성이 게으른 나는 그러한 당위가 현실적 구속성이 될 수 없었다.

    서너 달의 무위(無爲)는 결국 한더위가 몰려오면서 나를 방 바깥으로 내몰게 되었다. 언제 대포 소리가 작렬할지 알 수 없는 베트남의 그 붉은 지붕과 흰 벽의 마을을 조밀한 하얀 그물처럼 내리덮고 있던 정적이 내 상념 속에서 지속되던 그 여름에 무엇이든지 해서 그 희고 숨막히는 시간과 공간에 진한 색깔의 물감을 쏟아부어야겠다는 결론에 이른 나는 군생활 3년의 경험을 연장시켜 공사장에 나갈 작정을 했다. 토목공사 등을 주로 했던 공병이었으나 체구가 작고 힘이 약한 것이 나의 신체적 한계였다. 따라서 적나라한 힘이 필요한 큰 공사장을 선택할 수는 없었다.

    마침, 토목공사 청부인이었던 숙부가 철근 콘크리트 3층 건물의 공사 도급을 맡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나는 그 공사장에서 한 달 동안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곳은 내가 살던 부산시의 한 부분을 크게 차지하던 영도 고갈산의 새끼 산 산마루 바로 밑에 있었다. 이른바 달동네였다. 달리 기술이 없던 내가 맡은 일은 대개 시멘트 부대나 벽돌, 자갈, 모래 따위를 등짐이나 어깨짐으로 져서 나르는 일이었다. 트럭이 부려놓은 시멘트 부대를 어깨에 메고 공사장까지 옮기는 일은 힘은 들었지만, 위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골조 공사가 끝난 건물 외벽의 비계에 비스듬히 걸려 있던 발판 위를 무거운 등짐을 지고 올라갈 때에는, 더구나 점심 때가 가까운 시각에는 어질한 현기증과 함께 두 다리가 마냥 후들거리기만 했다.

    오전 일을 마치고 다른 인부들과 함께 둘러앉아 먹는 점심 밥에 떨어지던 땀방울의 염도는 또한 하꼬방들의 파도 위에 불어오던 바람은 참으로 서늘한 위안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아득한 기억은 건축물 쓰레기를 반쯤 실은 리어카를 혼자 끌고 공사장 뒤편의 공터를 향해서 올라가던 일이다. 별 생각없이 리어카의 앞 가로대를 허리 힘으로 버티며 완만한 비탈길을 오르던 나는 이내 내 뒤에서 엄청난 무게가 나를 끌어당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무게 중심이 점점 더 내게서 멀어지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 무게 중심이 나의 물리적 통제력과 정신적 인내력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 결과가 무엇이 될지는 너무나 명백했다. 비탈길은 곧장 나락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일이 고된 날일수록 하루 열 시간의 일을 끝내고 땀투성이 흙투성이가 되어 밤 8시쯤 버스 뒷자리에 앉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곤한 잠에 빠져들곤 했다. 그러나 때때로 피곤이 덜한 저녁에는 귀가를 늦추고 공사장 뒤편의 산마루 풀밭에 누워 점등하기 시작한 바다 저쪽의 도시와 검은 먼 바다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기도 했고 「고문진보(古文眞寶)」의 한시(漢詩) 구절들을 떠올리기도 했다.

    끈끈한 감각의 한여름 밤은 한낮의 구름 그림자처럼 설핏하게 지나가는 초여름 밤의 입구처럼 아름다운 밤은 아니었지만, 나의 상념은 때로는 길을 잃기도 했다. 그것은 공사장 뒤에 있던 루핑 지붕의 하꼬방에 살던 한 젊은 여자의 얼굴 때문이었다. 그녀는 한낮이면 찜통 같은 단칸방을 나와서 갓난아기를 안고 공사장을 구경했다. 건강한 피부에 중키의 그녀는 아름다운 얼굴에 육덕(肉德)이 옷을 찢고 나올 듯이 팽팽히 넘쳤지만 굳이 흠이라면 이빨이 누런 것이었다. 나는 이런 아름다운 여자가 최악의 주거에 살게 된 운명은 아마도 신이 그녀의 이빨 색깔을 칠하다가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객쩍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저녁에 귀가하는 단아한 용모의 그녀의 남편을 보고는 미녀는 결국 미남이 차지한다는 개연성 같은 것을 느꼈다.

    별이 돋아나기 시작하는 자주색 밤하늘을 쳐다보면서 여름밤을 읊은 한시 구절을 좇다가도 문득 망망한 허공중에 걸리는 그녀의 산음(山陰) 같은 눈동자에 나는 흠칫 놀라기도 했다. 그리고 블라우스 틈새로 담대하게 엿보이던 붕긋한 젖무덤이 잇따라 나타날 때에는 저절로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달포 동안의 노가다 생활을 끝낸 마지막 귀갓길에서 나는 당연히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다는 현실을 아쉬워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공사장을 떠날 무렵에 새로 온 젊은 인부들이 번들거리는 눈빛과 함께 그녀는 향해서 거침없이 내뱉은 말들에 내 환상은 상당한 충격을 받은 후였다. 그것은 이 인근에서 처녀시절을 보낸 그녀가 결혼 이전에는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겼다는 증언이었다. 완전히 붕괴되지는 않았지만, 환상은 누런 이빨 자국이 이미 크게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나이 쉰을 넘어서서 이 글을 쓰는 나는 그때의 노동의 의미가 한갓 낯설기만 한 안일한 관성의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역시 쉰은 좋이 되었을 그녀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다시 만들어지고 있다. 그녀의 하꼬방 결혼생활이 한 지아비와 어린 자식과 함께함으로써 아름다웠다면 자유연애를 구가했던 그녀의 처녀시절 또한 자신을 사랑한 청년들과 함께함으로써 아름다웠을 것이라는 것이다. 가난한 시대는 가난한 애인을 만들었지만 또한 지순한 지어미를 만들기도 했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나는 지금 한 세대 전의 부정적인 기억을 수정할 수밖에 없다.


    (제목 미상의 잡지에 게재. 1995년 추정.)
  • 작년 연말엔가에 지구의 동 식물 중 5-20퍼센트가 멸종 위험에 있다는 유엔환경계획의 보고서가 요약되어 게재된 신문지면에 나는 기분이 섬뜩했던 기억이 있다. 그 기사는 1,300만 -1,400만으로 추정되는 지구의 생물 종(種)들 중에서 1994년의 시점을 기준으로 할 때에 1만여 종이 절멸 위기에 있다는 것이었다. 전체 비하면 그 비율은 사소한 것 같지만(조사 대상이 된 종만 하더라도 175만 종이었다), 1600년 이래 전멸된 종이 1,138종인 데에 비하면 가히 천문학적인 숫자라고 하겠다. 그 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의 자연 파괴에 의한 인간의 재앙에 있다고 한다.

    그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문득 절대적으로 쇠퇴해가고 있는 나의 생업인 출판업의 현재적 위기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달포 전부터 신문 지면에는 “지구의 허파”라고 하는 열대우림이 불타오르고 있다는 요란한 기사가 등장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물론 인도네시아의 열대우림의 경우에는 작년에도 그 불타는 연기가 이웃 나라들의 하늘까지 뒤덮었다지만, 올해에는 그 나라의 열대우림말고도 아마존의 그것도 화마에 휩싸이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동식물 종들의 절멸 뉴스보다도 열대우림 화재에 더욱 놀란 것은 인류의 생존 자체가 지구의 허파 파괴에 의해서 재앙에 직면했다는 원론적 경악도 경악이려니와 한편으로 출판업의 근본이 되는 종이를 제공하는 나무들이 사라져간다는 위기감에서였다.

    나의 이러한 경악과 위기감은 다분히 감상적이고 표피적인 것이겠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은 지구 지도에서 열대우림의 원초적인 진녹색의 면적이 줄어들듯이 산업 지도에서 출판업의 역사적인 면적이 줄어들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적 사실이며, 그것도 종이가 매체가 되는 고전적 책 출판업은 지구상의 하고 많은 산업의 종들 중에서, 절멸될 수밖에 없다는 운명적 사실이다. 전자 매체의 가공할 위협 앞에서, 그것의 운명은 절멸되어가는 지구 생태계의 희소 종들의 운명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러한 비관론은, 생각건대, 인류가 사라지지 않는 한에서는 기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언어가 생각의 집이라면 책은 언어의 집이기 때문이다. 물론 전자 문명이 인류를 광범위하게 지배하게 되는 21세기에 책의 형태가 현재와 같은 종이의 틀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대세가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자 책이 가지지 못하는 장점을 종이 책은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고, 종이 책의 생산을 업으로 삼는 낭만적, 고전적 출판인들이 존재할 것이라는 나의 믿음이야말로 종이 책의 미래를 담보하는 단서가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강대하의 격류를 바라보며 붓으로 역사를 기록했던 선인들의 후손은 지금부터 천년 후에도 우주를 달리는 은하열차 속에서 그 선인들의 기록이 인쇄된 종이 책을 읽고 있으리라는 것이 나의 또다른 하나의 믿음의 단서가 된다.


    (제목 미상의 잡지에 게재. 1990년대 후반기.)
  • 안보 위기, 경제 위기, 도덕성 위기, 환경 위기, 아이덴티티(정체성) 위기…… 우리의 해방 이후의 역사는 이런 위기들의 연속과 순환이었다. 신문과 방송매체는 주기적으로 이런 막다른 위기의 벼랑 끝으로 우리를 밀어붙여왔다. 하기야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민족사는 위기 특히 안보 위기의 연속이었다.

    역사를 상고하건대, 조선은 자신이 속한 문명권의 구심력과 원심력의 크기에 따라서 평화와 위기가 교체되었다. 한 무제, 수 양제, 당 태종, 원 세조, 청 태종, 일본의 풍신수길과 명치, 이들은 모두 동아시아 문명권의 거대한 구심력이었으며, 그 결과 조선은 이들 구심력이 자신을 향해서 움직일 때마다 국가가 존망과 위기를 경험했다. 그러나 조선은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함으로써 역사의 고난 속에서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해왔다.

    바깥에서 지쳐들어오는 이러한 힘의 위기들을 극복한 이 민족에게 역사는 백성이 주인이 된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위기극복을 강요하고 있다. 외환(外患)이 아니라 내우(內憂)라는 태생적, 근본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위기극복의 강요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매스커뮤니케이션에 등장하는 지금의 위기의 특성은 안보와 경제라는 복수 중첩의 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그것은 가속도가 붙어 사회와 그 구성원들을 심리적 공황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지금의 현실이 이럴진대, 북한이라는 단순 변수만이 적용되는 안보 위기를 제거하고 경제 위기만을 변수로 한다면 나는 다시 한번 오늘날의 국제적 구심력을 생각하게 된다.

    경제에 대해서 문외한인 나에게 대중매체와 전문가들이 전달하는 한국의 경제 위기는 상당 부분 일본의 몫이 좌우한다는 것이다. 특히 수출 주도의 한국 경제는 일본 돈의 가치에 의해서 영욕의 터널을 통과하는 것이 현실이다. 더욱이 우리의 현실이 슬픈 것은 봉건시대의 그들의 힘과 자본주의 시대의 일본 돈의 힘이 우리에게 작용할 경우 서로 반비례한다는 것이다. 일본 돈의 힘이 약해질수록 수출 위주의 우리 경제는 더욱 가쁜 숨을 몰아쉴 수밖에 없다니…… 언제까지 바깥의 힘이 이 나라의 명운과 진로에 장애가 되어야 하는가?

    그러나 나는 우리의 역사의 거울상과 현재의 실상을 구별하고 싶은 간절한 유혹을 느낀다. 실상이 위기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극복이 가능한 것이며 어떤 측면에서는 다분히 심리적 상징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의 위기, 특히 군사정권의 끊임없는 안보 위기 조성은 북한의 남침과 실질적 무력 위협에 의해서 증폭되었다. 그리고 경제발전과 더불어 경제 위기 또한 주기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경제발전은 무제한적인 자본주의의 파렴치한 욕망이 작용함으로써 한편으로는 환경 위기를 생산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성의 위기를 낳았다. 이 모든 위기의 복합체가 바로 정체성의 위기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들 위기는 언어의 상징화에 의해서 즉 지배 이데올로기의 힘에 의해서 확대 재생산된 것 또한 사실이다.

    과거의 안보적 위기는 우리의 의지와 힘의 바깥에서 온 것이되, 현재의 경제적 위기는 우리의 의지와 힘으로써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막말로 20여 년 전의 우리의 경제현실이 어떠했는가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위기” 운운하는 오늘의 우리를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경제 위기라는 언어의 폭력적 상징을 내치고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적 바탕 위에서 생산적 사고를 해야 한다. 언어의 상징적 폭력에 압도된 정신의 공황은 결국 힘의 진공상태를 초래한다. 이 진공에는 바깥의 힘이 필연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언어의 상징화에 의해서 이 사회의 한 특징이 된 “위기문화”의 비극은 현실직시의 겸허한 마음 곧 항심(恒心)에 곧추서 있을 때만이 극복되리라는 것이 나의 소박한 믿음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8일자 게재.)
  • 명문(名文) 중의 명문이라는 성경의 전도서 제1장 9절에서는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고 한마디로 단언했지만, 나는 자신이 글을 쓰는 첫째 목적은 물론이고 남의 글을 읽는 첫째 목적도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서라고 감히 말하겠다. “새로운 것” 하면 으레 지식과 정보를 생각하겠으되, 남의 삶을 체험할 수 있는 기록과 상상의 문학도 포함된다. 자신이 가보지 못한 여로의 삶과 가지지 못한 사상과 미치지 못한 상상과 지식이 생생하게 어우러진 내용의 글을 읽는 것은 곧 자신이 새로워지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아무리 새로운 것을 구할 수 있는 글이라고 하더라도, 정확하고 진실하지 않으면, 차라리 읽지 않는 것만 못하다. 부정확한 지식과 거짓 경험과 졸렬한 상상력은 언젠가는 그 글을 읽는 사람을 낭패하게 만들고 배신감을 느끼게 만들게 마련이다. 그리고 흔히 사람과 글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내용이 정직하고 솔직한 글은 우선 훌륭한 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윤리가 아니라 글의 내용의 진실성인 것이다. 하늘 아래 완벽한 인격이란 있을 수 없다. 그렇지만 솔직한 사람은 겸허하고 당당한 글을 쓴(詩經)다. 공자가 시경의 시 300편의 내용에 대해서 말씀한 “생각(하는 마음)(思無邪)이 사악함이 없다”를 시를 쓰는 마음의 자세에 대한 것이라고 확대 해석한다면, 나의 지나친 견강부회인가? 지금 명문으로 대접받고 있는 글들 중에서 (殉愛譜)위선적 감정 과잉의 우국충정과 순애보의 글들은 없는가?

    새롭고 확고한 지식을 전달하고 진실한 심정을 그렸다고 하더라도, 어휘가 부정확하고 문장이 번잡하고 단락이 불명확하다면, 글쓴이의 의도와 목적이 바르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특히 정확한 어휘를 쓰는 것[正名]은 그것이 가리키는 실체의 정체성(正體性)과 관계된다. 좋은 음식 재료도 숙수의 솜씨와 깨끗하고 반듯한 그릇이 있을 때에야 제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가지의 기본 요건을 갖춘 글이 가지런하게 마름질되었을 때, 곧 스스로 질서와 체계를 만들며 경제적으로 정리되었을 때, 나는 일단 명문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장황하고 까닭 없이 길고 두서가 없는 글은 비경제적인 글이다.

    “어문일치”의 뜻을 오해하고 글은 쉬운 단어와 쉬운 문장으로 물 흐르듯이 써야 한다는 미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말과 글이 일치할 수 있을까? 글은 눈으로 들어오는 “그림”이고 말은 귀로 들어오는 “소리”이다. 쉬운 어휘라고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은 물론이고 읽는 사람마다 지식과 사고와 경험의 수준이 저마다 서로 다르게 마련이다.

    “물 흐르는 듯한” 쉬운 문장이라고 하되, 드넓은 천리 장강(長江)도 다양하고 무수한 세류(細流)들이 한데에 합수한 것이고 산을 만나면 휘어져야 하고 큰 비가 지나간 뒤에는 흐름을 바꾸기도 한다. 더구나 수심이 깊을수록 물 밑에는 사공이 예상하지 못한 암초가 있을 수 있다. 관개수로식 문장이야말로 글을 쓸 때 경계해야 할 또 하나의 함정이다.

    쉬운 글을 써야 한다는 주장은 진정한 민중주의가 아니라 도리어 우중(愚衆)을 생산하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주장이 되기 쉽다. 자신이 모르는 단어들과 지식들이 간혹 나타나서 사전을 찾는 글 읽기야말로 가난한 행복의 작은 어려움이고 지식의 창고를 채워주는 작은 노고이다. 그렇게 무지한 사람도 이제 없으며, 그렇게 책 읽기가 경제적, 시간적 부담이 되는 시대도 아니다. 사전의 부피는 문화의 변천과 문명의 발전에 비례한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는 “하늘 아래 완벽한 것이 있을 리 없다”는 경고만큼 새삼 경청해야 할 완벽한 경고도 없을 것 같다. 글의 경우, 완벽의 추구가 감동의 실현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시로서는 발상이 별로 비범하지 못하고 구문이 상당히 길고 또한 번거롭지만,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님의 침묵”이 겸허하게 인도하는, 알 수 없는 초절의 길을 순간적이나마 나를 “차마 떨치고” 갈 수 있을 것이다.


    (「월간 조선」 2000년 7월호 별책 단행본 「한국의 명문」에 게재.)
  • 그날,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가 있는 부산시 서부의 동북쪽 산은 아침 안개에 싸여 있었다. 새벽부터 내리던 부슬비는 이미 그쳤지만, 한여름의 아침 대기(大氣)는 눅눅했다. 나는 책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 학교로 향했다. 그날은 시험, 그것도 대학 입시를 반 년 남짓 남겨놓은 고등학교 3학년 1학기 기말시험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나는 집안 사정을 핑계 삼아 진작부터 한 이태 뒤에나 대학에 가야겠다고 작정했다. 따라서 천성이 게으른 내가 시험공부를 제대로 했을 리가 없었다. 내 발길은 등교해야 하는 날로는 처음으로 학교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해 빗나가고 있었다. 학생 신분을 벗어나는 일은, 더구나 무단결석 따위의 일은 상상할 수도 없던 소심한 내가, 학교와 정반대 방향의 길을 한 시간 정도 걸어서 도착한 곳은 시외버스 터미널이었다.

    마땅한 정처가 없던 나는 마산행 버스를 탔다(책가방 속에는 두 달치인가의 월사금이 있었다.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는 월사금 체납이 없어야 했다). 마산에는 그때 내가 막연히 좋아하던, 소설가를 지망하는 한 여학생이 있었다. 그녀는 나보다 두어 살 연상이었는데, 이미 지난 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신분이었으니, 대입 재수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교복에 책가방까지 들고, 버스를 너댓 시간 타야 하는 부산에서 온 나를 그녀가 자신의 집 앞에서 어떤 표정으로 맞았는지는 기억에 없다.

    아무튼 나는 그 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은 뒤에 극장에 가서 앤터니 퀸이 에스키모로 나오는 “바렌”이라는 영화를 보고 저녁 무렵에 기차를 탔다. 그 영화는 “학생 입장가(可)”였지만, 극장은 내게 용기가 필요한 금지된 장소였다. 더구나 여학생하고 그런 비(非)학생적인 “행사”를 한 일은 이전에는 한번도 없었다.

    삼랑진 행의 표를 샀으나, 밤이 이슥해서 내가 무작정 내린 곳은 제법 큰 시골 역이었다. 역사(驛舍) 뒤로 강이 흐르고 있었다는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삼면의 벽 아래에 목제 긴 의자가 있던 역사 안에는 사람들이 서성거리며 다음 기차를 기다렸다. 몸이 피곤하기도 했고 저녁잠이 많기도 한 나는 아무도 없는 긴 의자에 혼자 앉아서 곧장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내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의자의 나무 틈에 숨어 있던 빈대들이 나를 내습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왜 의자에 앉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역사를 나와서 강둑 위를 걸었다. 둑 바로 아래 소리 없이 흐르는 검은 강물이 때때로 놀라서 요동치는 것은 큰 잉어가 수초나 그물 같은 것에 걸렸을 때였다. 달에 관해서는 기억이 없으나, 비가 온 뒤이기도 해서 여름 밤하늘에는 별들이 더욱 뚜렷하게 박혀 있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나는 한밤 대기의 서늘함과는 다른 따뜻한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여학생이 헤어질 때 내 손에 쥐어준 한 장의 접힌 지폐였다.

    삼랑진을 거쳐 밀양까지 올라간 나의 여정은 이틀 밤 사흘 낮의 짧은 기간이었다. 밤은 역사 부근에서 지내고 낮에는 발길이 가는 대로 무턱대고 걷다가 지치면 산기슭이나 물가의 나무 그늘에서 낮잠을 자기도 했다. 잎들이 여름에 지쳐서 때때로 후두둑 떨어지는 그 큰 나무들은 내게 큰 위안이 되었다. 흙먼지와 땀에 절은 책가방과 교복이 가뜩이나 작은 나의 몸을 더욱 작게 만들었던 나의 길은 낙동강과 함께 남행하던 비(非)포장도로의 끝에서 해가 서산에 넘어갈 때 끝이 났다.

    궁상과 빈 것들이 널려 있던 1960년대의, 청년기의 감수성에 허덕이던 나의 나날들을 추억이나 낭만의 대상으로 반추할 생각은 별로 없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단어는 슬며시 시간여행 기차를 태워 내게 40여 년의 간격을 거슬러 올라가서 밤의 시골 역사와 큰 나무가 있는 강 언덕에 앉아 있는 나를 찾아가게 한다.

    사흘 동안이라는 젊은 날의 일탈(逸脫)을 “행복”이라는 제목의 글로 써야 하는 단조로운 나의 일상의 행복은 무엇일까? 행복이란, 달리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기차 안에서 옆사람과의 대화도 잊은 채, 끊임없이 과거완료형이 될 수밖에 없는 차창 밖의 어두운 밤 풍경 속에 떠오르는 행인을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일까?

    밤길을 끝없이 가야 하는 고단한 행인 역시 자신의 바로 앞에 어제 내린 비로 질펀해진 물웅덩이가 있다는 현실도 모른 채 그 기차 차창 속의 포근한 불빛을 그리워할 수 있을 것이다.


    (「월간 조선」 2002년 1월호 게재.)
  • 나는 십여 년 전부터 별다른 일이 없는 금요일이나 토요일에는 인사동에 자주 갔다. 그즈음 첫여름 오후, 인사동의 한 가게 진열장에서 내 시선을 뺏은 것이 있었는데, 자그마한 토기(土器) 항아리였다. 그뒤부터 나는 더 자주 인사동에 갔고, 그 토기 항아리가 인연이 되어 이삼십 개의 토기를 가지게 되었다.

    나는 결코 토기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러나 토기를 보기 위해서 국립박물관에도 수없이 갔고, 또 토기 전시회가 있다면 제법 먼 거리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내가 유독 토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와 같은 다른 그릇들은 볼 만한 것이면 내 분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고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천 년 전, 이천 년 전의 고대인들이 빚은 토기들의 원초적인 아름다움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제사나 생활을 위해서 토기를 빚었는데, 그들의 미에 대한 근본 인식이 현대인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토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토기, 그것은 결코 예술적 심미안을 위해서 곧 감상을 위해서 만들어지지 않았다. 물론 자기(瓷器)를 비롯한 대부분의 도자기들도 예외가 아니다. 근대의 도예가들이 만든 예술 도자기들 말고는 무릇 모든 도자기는 제기(祭器)까지도 인간의 생활 필수품(옛날에는 제사도 인간 생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이었다.

    흙, 불, 물, 공기 등을 이용하여 인간이 최초로 만든 합성물이 토기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손이 조형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미의식이 최초로 투사된 조형 예술이야말로 토기 예술일 것이다. 물론 초기에는 고대인들은 그것을 그릇 자체의 목적 이외의, 즉 용기 의외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의 토기는 인간의 어떤 의도도, 작위도 개입되지 않은 원초적인 순수한 미(美)의 구현체이다. 더구나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해주는 음식물을 가공하고 보존하기 위한 원시적 목적을 적나라하게 달성하는 수단이었는데, 그래서 나는 오히려 그런 고대인 들의 생존의 처절한 요구가 빚은 토기를 사랑한다.

    그렇다면 토기에는 삶을 위한 용기라는 그 자체 이외의 그 어떤 목적도 개입되지 않았다는 말일까. 최초의 토기는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천 년, 이천 년의 시간이 지나가게 되면 의도와 작위가 개입되고 기술 또한 진보되어 정교한 토기들이 나타난다. 재산과 사회적 신분과 위계가 생기고 그것들이 제도화되면 그릇 또한 위계화되어 인간의 지혜가 개입되어 그릇은 정교화되었다. 그러나 그릇은 그릇 그 자체의 목적을 벗어나서 빚어지지 않았다. 지혜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그릇을 바친 초자연적인 신과 절대 강자에 대한 도공의 자연적인 받듬 정도일 것이다. 실생활을 위한 목적, 이것이 고대 토기의 아름다움의 진수인 것이다.

    나의 토기에 대한 애정은 결코 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은 토기를 보러 가는 일이 전보다는 뜸해졌다. 특히 토기와 함께 있기도 하는 조선백자에 눈길이 가게 되면서부터 나의 경제적 자존심이 훼손되는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한 토기의 값도 만만치 않았지만 조선백자의 값은 내가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액수이다. 내게는 옛 그릇 값을 가지고 줄다리기를 하는 것은 힘에 겨운 일이었다. 그만두자. 이태 전부터 나는 토기에 대한 사랑을 접기로 작정했다. 너무나 좋은 토기나 웬만한 조선백자 하나에 수만금을 지불하여 내가 바보라는 뒷소리를 들어도 좋을 때까지는. 그때 나는 다시 이태 전처럼 인사동에 자주 갈 수 있을 것이다.


    (「국민일보」 2004년 3월 4일자 게재.)
  • 짧게는 석 달, 길게는 여섯 달이라고 하던 그의 시한부 생명이 이제 한계에 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 지인(知人)은 길게 잡은 여섯 달 시한조차 무려 세 번이나 뒤로 물러서게 할 만큼 자신의 생명의 불을 당당하게 지켜왔던 것이다.이제 의학이 발달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의 불이 꺼질 시각을 알 수 있게 된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있다. 그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불행이라고 해야 할까. 선택적으로 대답할 자신이 없는 나는 그 까닭을 육십을 넘긴 내 나이 탓으로 돌리고 싶은 심정을 어쩔 수 없다. 내가 나의 생명의 등잔에 남아 있는 “기름”의 양을 알게 될 때, 나는 어떤 생각과 태도를 취할까?

    그 지인은 자신의 시한부 생명에 관해서 억울하고 모진 통고를 받은 그날부터 죽음에 의연하게 맞섰다. 자신의 사후에 대비하는 사회적 조처를 한 뒤에 그는 결연하게 암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거듭되는 강력한 항암 치료로 신체적 불균형이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얼굴과 몸의 타고난 단아함을 결코 잃지 않았던 그는 달라져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얼굴을 세상에 숨기지 않았다. 가망이 없는 상황에서 입원하게 되는 열흘 전쯤의 주말에도 버스를 타고 지기들과 함(躍如)께 시외의 미술관 나들이까지 하는 정신이 약여했다.

    점점 더 가까워져가는 마지막 시간을 알면서도 도심에서 외식도 하고 심지어 해외 출장까지 가는 그의 모습에 중첩되어 이 글을 쓰는 이 새벽의 나의 책상 앞 유리창 위에 떠오르는 한 얼굴이 있다. 참으로 그리운 얼굴이다.

    그 준수한 얼굴의 임자가 치명적인 병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그가 병원에 들어간 지 한참 후였다. 전화 저 멀리에서 그의 아내는 그간의 자초지종을 짧게 설명한 후 찾아가겠다는 나의 청을 부드럽게 거절했다. 당신 자신이 그 누구도 만나지 않겠다는 완강한 뜻을 가졌다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야속하게 생각했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달포가 좀 지난 후 9월이 끝나갈 무렵, 그의 부음이 왔고, 빈소에서 미망인은 고인이 거의 혼수 상태에서 다만 한 친구와 한 후배만을 각각 불러서 따로 만났다고 했다. 그 고인은 이미 입원 당시에 자신의 생명의 불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탱될지 충분히 알았지만, 행동과 생각이 크고 넓고 직립했기 때문에 결코 죽음에 대해서 구차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당대의 문장가라고 할 수 있었던 그의 글 역시 사무사(思無邪)와 절차탁마(切磋琢磨)라는 표현에 결코 부끄럽지 않은 글이었다. 뚜렷하여 각별(各別)하되 양명(陽明)한 친구였다.

    그 고인은 내가 앞에서 쓴 그 지인과는 전혀 다른 사고와 행동을 했던 것이다. 그는 죽음의 시한을 알게 된 날부터 세상과 일체 절연하고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밥을 먹고 몇 평인가의 병실에서 기나긴 여름의 나날들을 혼자서 보냈다. 그의 아내가 밤낮으로 수발을 들었으니, ‘둘이서’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여름 밤은 짧았지만, 아내와 함께 보내던 그의 안타까운 새벽은 마침표가 찍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고인에게 한 칸 방이 자신의 생명의 불을 밝힐 넉넉한 공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지극한 아내의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 지인에게 이 넓은 사회가 자신의 따뜻한 공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내의 사랑에 곁들여 한 친구의 돈독한 우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지인의 긴 투병 기간에 그의 친구는 자신도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는 좁은 길을 가야 하는 때도 있었지만, 언제나 그의 손을 놓지 않고 같이 걸었던 훌륭한 친구였다.

    자신의 죽음의 시한을 알 수 있는 것은 다행일까 불행일까. 나는 그 물음에 결코 답할 수 없으나, 그런 한계상황에서 다시 만남을 도저히 약속할 수 없는 헤어져야 하는 사람에게 망자(亡者)가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남겨줄 것인가 하는 것은 망자 자신의 결정이라는 것만은 말할 수 있다. 평상의 자신의 얼굴을 지인들에게 남겨놓으려는 망자는 그 고인처럼 세상과의 절연을 선택하지만, 반면에 비(非)평상의 자신의 얼굴을 남겨놓게 되는 망자는 그 지인처럼 끝까지 세상과의 관계를 선택한다. 한쪽은 평상의 얼굴을 ‘세상에’ 두고 가고, 다른 한쪽은 평상과 다른 얼굴을 ‘지인들에게’ 두고 간다. 다만, 보통 사람의 경우, 순리와 정상은 ‘다른 한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죽고 나면 주검을 온전히 그대로 가져가는 매장이든, 하늘에 흩날리는 연기와 땅에 흩뿌리는 재로 남기는 화장이든, 망자가 참으로 세상에 두고 가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때때로 기억하는 자신의 마지막 얼굴이다. 그 얼굴이 평상의 것이든 비평상의 것이든, 그리운 것은 그리울 뿐이고 그리워해야 할 것은 그리워해야 할 뿐이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도록 그리운 피안의 사람을 추억하는 사람에게는 이승의 밤이 깜깜하면 깜깜할수록 유리창 위에 떠오르는 그 얼굴의 형상이 더욱 또렷할 것이다.

    밤의 두터운 적막 속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별은 당신의’ 얼굴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당신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그리운 망자의 얼굴이 오롯하게 눈앞에 떠오른다면, 그 얼굴은 다른 그 누구의 밤이 아니라 ‘나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이다. 이 밤이 가고 날이 밝으면, 나는 그동안 닦지 못했던, 아니 구조적으로 대부분은 닦을 수 없는 붙박이로 되어 있는 아파트 마루방의 전면(前面) 유리창에서 먼지를 닦아낼 방법을 찾아보아야겠다.

    유리창이 맑고 깨끗해지면, 행여 나의 성년이 된 딸도, 이 복잡한 소음의 도시에서일망정, 혼자 있는 깜깜한 밤에는 유리창에 입김을 불어 검지 끝으로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고 이름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조선일보」 2007년 4월 7-8일자 게재.)
  • “이 겨울, 우포늪에…… 글쎄, 그건 바보나 가는……”

    내가 오륙 년 동안 보고 싶어했던 경남 창녕 우포(牛浦)늪에 가족들과 함께 가기로 했다는 말에 친구가 한 코멘트였다. 한겨울의 우포늪은 물도 모자라고 황량하여 가볼 만한 곳이 못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사계절 답파의 노고를 아끼지 않았던 우포늪의 예찬자였다. 그 늪에 가야겠다는 나의 막연한 희망을 구체적인 계획으로 만들게 한 것도 그 친구의 예찬이었는데, 바로 그의 입에서 “바보나 가는”이라는 기대 밖의 발언이 나온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70만 평의 국내 최대의 자연 늪지. 창포, 갈대, 붕어마름, 가시연꽃, 큰기러기, 청둥오리, 왜가리, 고니. 물이 7만 평이나 되는……” 이런 표현들이 따라붙는 우포늪은 그 친구의 예찬은 물론 K선생의 사계절 사진에 의해서도 입체적으로 형상화되어 내게 환상을 넉넉하게 심어준 곳이었다. 특히, 청둥오리 한 마리 한 마리가 유(遊泳)영의 궤적을 청보라 수면에 빛의 띠로 남기는 K선생의 겨울 우포늪 사진은 내가 이 겨울 그곳에 가야 하는 이유를 더 설명할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아들과 딸을 하나씩 둔 나는 그들이 십대가 된 뒤로는 같이 여행한 일이 없었다. 새해도 되고 아들이 올봄에 집을 떠날 일도 있고 해서 십이삼 년 만에 가족여행을 생각하게 되었고, 나는 친구의 미완성 코멘트에 ‘길’을 덧붙여 ‘바보나 가는 길’을 가기로 결정했다.

    이제 드디어, 곧고 길게 뻗어 있는 겨울 제방 위에서 나는 우포늪을 한눈에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나 정오의 햇빛 속에서 드러난 우포늪의 모습을 40년 전 낙동강 하구의 을숙도(乙淑島)의 갈대밭과 철새들의 군무를 기억하는 내게는 여느 강의 일부나 큰 호수에 지나지 않았다. 단지 늪 가장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겨울 철새들이 스산한 풍경에 악센트를 찍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들도 며칠 동안 계속되는 강추위 탓인지 비상도 군무도 보여주지 않았다. 바람에 물결치는 갈대밭이 없다면, 겨울 늪은 자신의 존재가 옹색할 것이다. 나는 더 많은 것이 마련되어 있는 풍경이 나타나리라는 막연한 기대 속에서 제방 위를 걷기 시작했다. 식구들은 저 멀리에서 칼바람 탓에 이미 걷기를 포기한 것 같았다.

    내가 이십대에 자주 갔던 낙동강, 그 낙동강이 바다와 만나는 드넓은 하구에는 삼각주 을숙도의 갈대밭이 가득히 펼쳐져 있었다. 황색 갈대밭은 “밭”이라는 어휘가 감당할 수 없는 큰 “벌”이었다. 황량한 갈대 벌과 그것을 감싸안고 있는 강물에 겨울 하오의 햇빛은 한꺼번에 한 과녁을 향하는 수십만 개의 화살처럼 쏟아졌다. 강을 따라 무한대로 뻗어 있는 낙동강 서안의 제방에서 내려다보이는 도도한 강물과 거대한 삼각주의 화폭 위로 대자연의 침묵을 깨는 큰기러기떼는 하늘을 뒤덮으며 군무를 연출했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면서 6,000년 전에 태어났다는 우포늪은 낙동강 하구처럼 그때에는 드넓었을 것이다. 그리고 날이 따뜻해지면서 갈대숲이 우거지고 계절마다 철새들이 찾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넘쳐흐르는 여름 물을 막기 위해서 인간은 얼마 전에 제방을 쌓았다. 지구에 비하면, 아니 낙동강에 비하더라도 한낱 점에 지나지 않는 이 늪지에까지 인간은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 경계를 만들었다. 자연에서 하나였던 뭍과 물을 서로 분리한 것이다. 우포의 제방은 인간이 자연에 가한 테러의 산물이었다. 그 물은 제방이 많아질수록 점점 더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겨울이 오면 더 움츠러들었다. 그 겨울 물을 나는 찾아온 것이다.

    제방의 1킬로미터 직선이 오른쪽으로 휘는 지점에서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갈대 덤불 속에서 왜가리 한 마리가 몸을 오그리고 떨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지난여름을 여기에서 지내다가 가을에 무리에서 탈락하여 돌아가지 못한 채 이 겨울을 혼자서 나는 모양이었다. 청둥오리들이 청색 머리를 반짝이며 유영을 하고 있었다. 빈약하지만 갈대덤불도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겨울 하오의 햇빛이 쏟아지는 물 위로 큰기러기들이 비상했다. 나는 미약하게나마 늪이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늪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를 내게 보여준 것이다. 태고의 우포늪은 잠들어 있을 뿐이다.

    우포로 오는 길은 오랫동안 내게 풀어야 할 하나의 숙제였다. 나의 우포늪은 글을 통해서 지식이 되었고, 그 지식은 사진을 통해서 형상을 얻었다. 그러나 지금 내 앞에 펼쳐져 있는 그 형상은 나의 그 형상이 아니었다. 나는 현실에서도 우포늪의 형상이 완성되는, 사방에 물이 가득히 넘쳐 태고의 자연이 소생하는, 홍수가 뭍과 물의 경계를 없애는 여름의 우포늪에 다시 한번 오려고 한다. 나의 그 두 번째 여정은 “바보나 가는 길”이 아니라 “현자가 가는 길”이 될 것인지…….


    (「조선일보」 2008년 3월 1-2일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