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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엄격함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 칸트 그리고 실재의 궁극적 본질

천사들의 엄격함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 칸트 그리고 실재의 궁극적 본질

책 소개

우리가 감각하는 현실은 세계 그 자체인가? 인식의 한계까지 밀어붙인 세 지성의 지적 호기심과 깊은 통찰을 만나다 우리가 속한 현실의 실제 모습은 우리의 생각과 얼마나 닮았을까? 혹시, 우리가 “현실”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그저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인문학자이자 문학 비평가, 철학자이기도 한 윌리엄 에긴턴은 아르헨티나의 시인이자 소설가 보르헤스, 불확정성 원리를 주창한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 근대 계몽주의 철학자 칸트라는 세 사람의 삶과 저작을 독창적으로 연결함으로써 실재의 본질을 탐구한다. 보르헤스의 소설에서 제목을 따온 이 책은 우리가 경험하는 실재가 “천사들의 엄격함”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제한적인 관점에 따라서 좌우됨을 보여준다. 문학과 철학, 물리학으로 분야는 다르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세 천재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와 우리가 감각하는 세계가 다르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것을 파고들어 우리 이성의 불완전함을 탐구하고, 그런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세계를 풍부하고 장엄하게 경험하는 이유, 자유의지의 의미와 우주의 기원, 도덕의 필요성 등을 고찰했다. 인간 인식의 한계에 대한 이들의 치열한 사유는 우리의 사고방식을 세계에 투사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세계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으며, 모든 것은 “관계”로서만 존재한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실재와 관련한 세 천재의 깊은 통찰은 사랑과 우정의 상실, 지적 열망과 치열한 논쟁으로 가득했던 그들의 삶에서 꽃을 피웠다. 이 책은 때로는 마감 기한을 놓쳐 협박 편지를 받고(칸트), 실연의 슬픔에 잠겨 무모한 짓을 저지르며(보르헤스), 시대의 천재이자 학계의 대선배인 아인슈타인과 끊임없이 논쟁하는(하이젠베르크) 세 사람의 모습을 마치 소설 속 등장인물처럼 생생하고 매력적으로 전달하며 독자들을 흥미로운 사색의 숲으로 이끈다. 세 지성의 사유를 따라가며 인간 인식의 한계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은 “실재란 어떠해야 한다”는 관점을 넘어 인간성의 한계와 가능성을 탐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차례

서론 | 그것은 어디로 갔을까? 제1부 시간의 편린 위에 서다 제1장 망각 불능증 제2장 바로 이 순간의 짧은 역사 제3장 시각화하라! 제2부 신이 아닌 존재 제4장 양자 얽힘 제5장 영원의 상 아래에서 제6장 눈 깜짝할 사이 제3부 우주에 끝이 있을까? 제7장 다른 사람들이 도서관이라고 부르는 우주 제8장 엄숙함 제9장 측정하기 좋게 만들어진 우주 제4부 자유의 심연 제10장 자유의지 제11장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 제12장 근심과 원한을 벗어던지고 후기 감사의 말 주 참고 문헌 더 읽어볼 만한 책 인명 색인

저자

윌리엄 에긴턴William Egginton
존스홉킨스 대학교의 현대언어문학과 교수이며 알렉산더 그래스 인문학 연구소의 소장이다. 저술한 책으로 『소설을 발명한 남자(The Man Who Invented Fiction)』, 『미국 정신의 분열(The Splintering of the American Mind)』,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Alejandro Jodorowsky)』 등이 있다.

역자

김한영
김한영(金韓榮)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예술대학교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했다. 그후 오랫동안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며 문학과 예술의 곁자리를 지키고 있다. 옮긴 책으로 『그러나 절망으로부터』, 『아이작 뉴턴』, 『진화심리학 핸드북』, 『언어본능』, 『빈 서판』, 『헨리 데이비드 소로』, 『사랑을 위한 과학』, 『본성과 양육』, 『미국을 노린 음모』,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등 다수가 있으며, 제45회 한국백상출판문화상 번역 부문을 수상했다.

출판사 리뷰

세계는 파편화된 인식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통합하는 “나”가 있다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천사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이다 여기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가 있다. 그는 자신이 겪은 모든 순간의 모든 장면을 이파리 한 장까지 정확하게 기억하지만, 이 순간을 다음 순간과 연결하지 못한다. 하루를 회상하는 데에는 또다른 하루가 꼬박 걸리며, 한 마리 개의 앞얼굴과 옆얼굴은 같은 개체의 것으로 인지되지 않는다. 보르헤스의 소설 「기억력의 천재 푸네스」는 이처럼 감각 세계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지각하지만 그것을 선별하고 조합하지 못하는 인물 푸네스를 통해 “자아”와 “실재”의 관계에 대해서 묻는다. ‘만일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시공간의 편린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실재를 탐구할 수 있는가?’ 이는 시공간상으로 통일된 “자아”를 발견한 칸트의 철학과 연결된다. 세계는 실제로 푸네스의 세상처럼 단절되어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통일된 자아를 통해서 그것들을 인과적으로 연결할 수 있다. 즉 자아는 그 자체로는 경험할 수 없지만,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인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 자아를 통해서 세계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러 명제 중 우리의 상식에 부합하는 것만을 취해서 그것을 “진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칸트는 이처럼 우리가 이해한 방식을 세계 그 자체라고 생각할 때, 우리가 우상을 만들 수도 있다는 점을 경계했다. 그로부터 100여 년 뒤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 원리를 발견했을 때 그것이 불러온 반발 또한 우리가 시공간을 통해 총체적인 실재를 파악할 수 있다고 가정한 결과였다. 시공간의 연속성을 가정한 고전물리학과 달리, 양자의 세계에는 불연속성과 단절만이 존재했다. 전자는 중간에 여행한 흔적도 없이 새로운 궤도에 나타났고, 탐지될 때까지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다가 탐지된 순간에야 그동안 어디에 있었는지를 “결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고전적인 과학의 세계관을 뿌리째 뒤흔드는 그 세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시공간상 2개의 다른 순간을 연결하는 일이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우리가 묘사하는 물리법칙이란 물체가 어떻게 운동하는지를 우리가 어떻게 관찰하는가에 관한 법칙이라고 보았다. 실재는 온전히 파악할 수 없으며, 우리는 그것에 우리 나름의 자아를 투사함으로써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른 것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관계”로 이루어진 실재 하이젠베르크, 칸트, 보르헤스는 총체적인 실재를 이해하기 위해서 절대적인 존재 혹은 원인 없는 자연발생을 가정하는 대신 그 자리에 “관계”를 놓았다. 그들에 따르면 세계를 감각하고 그것을 연결하는 “나(관찰자)”를 비롯한 모든 실체의 본성은 관계로서만 존재한다. 세 명의 천재 중에서 최고의 존재, 즉 시공간의 연속성을 부정하면서 가장 큰 어려움에 직면했던 사람은 단연 하이젠베르크일 것이다.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성 원리를 인정하지 않는 아인슈타인과 지속적으로 논쟁하면서, 관찰 행위와 그 정보들을 연결하는 노력 너머에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한 실재가 존재한다는 가정을 기꺼이 무시했다. 그는 시공간 속의 물체가 항상 다른 물체와 관계를 맺으며, 관찰자는 그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서 필요한 존재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최고의 존재가 없는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준점으로 삼아야 할까? 칸트는 삼각형의 정의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삼각형을 우리가 볼 수 없듯이, 핵심적인 인간 지식은 감각 세계와 무관해야 한다고 보았다. 우리가 알려고 하는 것은 객관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우리의 그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세계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지만, 그 대신 관찰 대상들 사이에 관계를 맺음으로써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진술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가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물질세계가 전체적으로 통합되어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실재를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을 가정해야 한다는 칸트의 생각은 보르헤스가 소설 「알레프」에서 보여준 “영원성”의 탐구와 연결된다. 우리는 시간에 얽매인 존재이지만, 동시에 우리 내면의 어떤 것은 회상과 기억 등을 통해 시간성을 벗어난다. 그런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이를 탐구하기 위해서 보르헤스는 죽은 연인의 집 지하실 속에 “알레프”라는 작은 원반이 있고, 그 안에 우주가 숨겨져 있다고 상상했다. 소설 속에서 “알레프”는 사랑과 상실을 경험한 주인공에게 끝없는 우주를 펼쳐 보이면서 우리의 자아가 어떤 것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영원성”과 같은 궁극적인 개념을 가정해야 함을 보여준다. 비록 인간이 영원성을 고찰할 수는 없지만, 흘러간 과거와 다가올 미래가 존재해야만 그것들을 모음으로써 우리가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는 존재하는가? 매혹적인 세 천재의 삶이 던지는 질문 칸트와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최고의 업적을 남긴 천재들이지만, 그들에게는 각기 크고 작은 인생의 흠이 있었다. 보르헤스는 칠레의 군사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하이젠베르크는 나치에 속해 핵분열을 연구했다. 칸트는 표현의 자유를 주장했지만, 국가의 검열 앞에서 굴복하며 스스로의 논리를 어겼다. 자신의 잘못(혹은 실수)을 부정하거나 후회하는 그들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자유와 책임이라는 오래된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삶의 길을 자유롭게 선택할까, 아니면 우리의 모든 선택이 물리적 세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일까? 자유의지의 존재 여부를 묻는 질문은 시공간에 예속되지 않은 위치를 가정하는 맹점을 지닌다. 자유의지가 실제로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초월적인 존재든, 입자 수준에서부터 축적된 거대한 우주든 시공간을 벗어난 시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인지를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없으며, 따라서 책임도 질 수 없다. 저자 윌리엄 에긴턴은 시공간 바깥에 절대적인 무엇인가를 가정하는 대신, 우리 앞에 놓인 세계가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위의 출발점이며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기 쉬운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 자유의지라고 말한다. 우리는 시공간의 물리적 존재인 동시에, 여러 가능성을 시각화하고 그중 하나를 선택하는 이성적인 행위자이다. 칸트의 말을 빌리자면, 자유의지는 이성의 필요조건이다. 선택에 대한 책임 역시 여기에서 비롯된다. 보르헤스의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은 잘못된 선택에 대한 후회의 궤적을 보여준다. 한 가지 가능성을 선택하면 다른 가능성은 사라지는 현실과 달리, 보르헤스는 자기 선택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했을 경우를 상상하며 무한히 증식하는 길들을 그렸다. 이처럼 모든 가능성이 실현된다면 우리는 어느 쪽에도 책임을 지거나 공을 내세울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가능성이 실현되는 순간 우리에게는 선택할 자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 경우 행위자는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다. 즉 자유와 책임은 다르게 선택했을 경우를 상상할 줄 아는 이성적 존재의 필수적인 가정이자, 여러 갈래 중 내가 이 길을 선택했음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지난 선택에 대한 이해는 실재를 헤아리는 인간의 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지나간 일에 영향을 주었을 요소들을 선별하고 조합함으로써 그것을 하나의 줄거리로 완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치에 속해 핵분열을 연구한 하이젠베르크의 선택은 우리에게 어려운 문제를 던져준다. 하이젠베르크는 자신과 자신의 연구팀이 핵무기를 만들 기술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것을 무기 생산에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독일 과학자들을 취조했던 네덜란드 출신의 물리학자 사무엘 구드스미트는 그들이 자발적으로 나치에 봉사했다고 보았다. 어느 쪽이든, 오늘날의 우리는 그의 선택에 다양한 인과관계를 부여하고 그것을 필연처럼 만들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사건은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앎과 무관하게 벌어진다는 것, 그리고 그에 대한 판단은 그 자체로 어떤 도덕적 가치를 띤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치의 손에 가족을 잃었으면서도 끝내 하이젠베르크를 용서하기로 선택한 구드스미트의 모습은 진한 여운을 남긴다. 보르헤스는 소설 「바벨의 도서관」에서 우주보다 크지만 유한한 공간을 상상하며 그 공간의 중심에 바로 “당신”이 있다고 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와 칸트의 철학 역시 광대한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고 보았다. 모든 실체는 결국 그것들을 선별하고 연결 짓는 “관계”로서만 존재한다. 이 책은 물리학과 철학, 문학을 가로지르며, 우리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때 우리가 확고한 편견에서 벗어나 이성의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렇듯 우리의 세계가 “천사들의 엄격함”이 아니라 우리가 만든 엄격함을 따르고 있음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그 불확실성 속에서 또다른 무엇인가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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